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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by 고성제2023-11-03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이신다(삼하 6장). 이런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도 그럴 것이 웃사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썩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법궤는 사람들이 메거나 들고 운반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법궤의 네 귀에 고리를 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이 큰 잘못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 아니라, 다윗 왕이나 그의 종교 담당 비서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장대에 꿰어서 나르게 했더라면, 짐승이 날뛰어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져 손을 내민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웃사야! 고맙다!”는 음성이 들려야 할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고, 독자의 감정이 좋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화내기 전에 다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 우선 그 현장에 ‘웃사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언약궤도 거기 있고,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면 성경에는 그때까지 언약궤에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웃사의 죽음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마치 펼침막처럼 이 사건 배후에 펼쳐져 있는 그 에피소드들을 함께 살피며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 1


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무엘상 4장에 있다.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지역에 전쟁이 잦았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약 4,000명이 죽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한다.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그들의 생각은 미신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은 하나님을 조작가능한 분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사실 오늘 우리도 성경 계시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도 똑같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건 우리로서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늘 보는 것이 뭔가? 늘 애쓰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분! 쉽게 말하면 다르고 다르고 다른 분이다. 너무 다르고 다르고 달라서 어디 견주어 설명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


법궤와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얘기였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제 다시는 패배하지 않게 할 놀라운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조작이 가능한 분이 아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라, 마음대로 살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그냥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결과도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들은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비참했다. 전사자 수가 이전의 8배에 달했다. 게다가 법궤마저 빼앗겼다.


알다시피 이런 상황은 당시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지역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다곤이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은 분인가? 

이제 더 이상 만왕의 왕이 아닌가?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거절하고 사임하셨나?


블레셋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곤이 최고란 말인지? 우리의 다곤이 이제 이스라엘 신의 사업을 인수합병한 것이지?’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이다.


에피소드 2-3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블레셋 땅에서 일어난다.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인들은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승리에 몹시 들떠 있었고, 법궤는 그들에게 마치 승리의 트로피와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신전에 들러본 그들은 경악했다.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랐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신상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아예 잘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길하였을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 동네에 갑자기 독한 종기가 돌았다. 그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곤 했는데, 어디로 옮기든 피할 길이 없었다. 법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재앙이 내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아우성쳤다.


에피소드 4


얘기는 자연스레 네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삼상 6장).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제안했다. 궤를 보내되, 그 재앙이 그 신으로부터 왔는지 우연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그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준비해서 그것들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는 거다. 새끼는 집에 놔두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소들이 새끼를 두고도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그건 이 일에 이스라엘의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가져오면 안 되는 법궤를 가져왔다는 뜻이라고 보기로 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으로 치밀한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놀라웠다.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잘못 들지도, 멈추지도, 무얼 먹으려고 곁길로 빠지지도 않았고 새끼에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는 거다. 하나님은 포로였던 적이 한순간도 없으며, 블레셋 땅 다곤 신전에 있을 때도 그곳에서 여전히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포로로 잡기는커녕, 언약적 관계가 없는 그들은 그분의 상징물조차 그들 가운데 두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법궤를 두고도 저럴 정도니, 그분의 실재(real presence)를 감당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젖먹이를 둔 암소의 본능보다도 강렬했다. 그들이 그토록 잘못된 믿음의 미몽 속에 있을 때조차 말이다. 주님은 훗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거룩하신데, 그의 사랑도 자비도 모두 남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도, 블레셋인들이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분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5


이제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궤를 보고 너무 반갑고 궁금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그만 그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언약궤는 고핫 자손만 다룰 수 있고, 그들조차 만지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분은 완전 타자였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이해할 텐데, 달라도 완전히 달라 알거나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단지 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할 분이지, 분석하고 판단할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놀랍고 위대하기를 상상 자체가 불가할 정도라는 것이다.


에피소드 6


이제 본문 곧 마지막 법궤 얘기다. 이 일은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시는 중에 일어났다. 다윗은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풍악을 울렸다. 그때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궤를 옮기던 중에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놀란 웃사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지금까지 배후의 법궤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는데, 왜 웃사가 죽어야 하나…. 

설혹 웃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 죽는 건 좀 심하지 않나….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얄팍한 감정을 앞세워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비극까지 감수하고도 하시고자 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평범한 돌도 뒤집어 보고 나뭇잎도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웃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거나, 다시는 만지지 말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복음의 복음 됨을 더욱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임을 보게 된다.


단순히 “이제 웃사는 지옥 갔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사실 성경 인물들은 우리를 위한 드라마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이다.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드라마에서 배우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실제 그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웃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말하도록 위임받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웃사 사건은 복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어떤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냄으로 그렇게 한다. 사실 복음이 정말 제대로 기쁜 소식이 되려면, ①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②동시에 인간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③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어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깊고 풍성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면 웃사 이야기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웃사의 죽음을 그 이전에 이어져 온 법궤에 얽힌 이야기라는 펼침막 앞에서 법궤와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웃사는 왜 죽었나? 법궤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죽었다. 그는 왜 손을 댔나?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궤가 떨어져 더러워질까 염려한 것이다. 길에는 짐승의 배설물을 비롯해 더러운 게 많으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러운 것은 길에 떨어진 짐승의 배설물이 아니라 웃사 자신이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짐승의 배설물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웃사를 포함한 인간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웃사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걸 모르고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기억할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 보라고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 현장에 법궤가 있고, 그 뒤로는 이런 펼침막이 있다. 그 펼침막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거룩하다.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너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제 ‘알았다!’라고 말할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맺어준 언약 없이는 너희는 나의 상징물조차 너희 가운데 두고 누릴 수 없다. 나는 너희에 의해 조종될 수 없으며,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며 어디서든 다스린다.


이렇게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죽었을까? 앞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나? 그 펼침막 속에서 죽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얼 말해 주나?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죽었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성경은 그런 분이 죄인을 사랑하신 얘기다.


웃사 얘기는 웃사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웃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위하여 언약궤를 준비하신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대표로 삼아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궤에 담아, 손에 쥐어 주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웃사와 같은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망가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신들이 그러한 줄을 모르고, 넋 놓고 행동하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런 얘기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러운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법궤는 오래전부터 바로 그 사랑의 증거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하나님 임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법궤로 인해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서 웃사와 같은 죄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그 법궤와 거기에 담긴 언약은 웃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본문의 그림으로는 웃사가 자신이 어느만큼 죄인인지도 모르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궤를 주셨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웃사는, 오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미 수 없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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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성제

고성제 목사는 부산대학교 상과대학과 총신신대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평촌새순교회 담임목사와 (사)복음과도시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의 저자이다.